삼성전자 엔지니어에서 지방 스타트업 대표로: 신분상승인가 하락인가
- 04 Dec, 2025
명함 두 개
명함을 두 개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공정기술팀 책임연구원”. 2014년부터 2021년까지. 7년.
다른 하나는 “㈜스마트링크 대표이사”. 2021년 12월부터 지금까지. 3년 2개월.
KTX에서 노트북 열고 작업하다가 옆자리 사람이 물어본다. “무슨 일 하세요?”
“스타트업 합니다.”
“어디 다니셨어요?”
“삼성전자요.”
그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 “아, 그래서 창업하셨구나.”
근데 속으로는 생각한다. ‘퇴사한 거지, 창업한 게 아니라.’

기흥 7년
기흥 공장 3년 근무하면 반도체 공정 전체가 보인다고 했다.
나는 7년 했다.
클린룸 들어가는 날이 1년에 200일. 방진복 입고 8시간. 에어샤워 지나가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라인 멈추면 억대 손실. 그걸 막는 게 내 일이었다. 밤 11시에 전화 오면 15분 안에 공장 도착. 새벽 2시에 라인 살리고 새벽 4시에 집 도착.
연봉은 1년차 4800만원. 7년차 8500만원. 보너스 포함하면 억 가까이.
대전 아파트 전세 2억 5천. 여유 있었다. 아내도 공무원이라 안정적이었다.
근데 40살까지 이렇게 살 수 없었다.
라인 문제 해결하는 건 잘했다. 근데 내 문제는 못 풀었다.
“이게 내 일인가.”
3년째 같은 질문. 7년째도 답은 없었다.

창업 아닌 퇴사
2021년 9월. 사표 냈다.
팀장이 물었다. “뭐 하려고?”
“스타트업 차릴 생각입니다.”
“아이템은?”
“제조업 쪽 스마트팩토리 솔루션이요.”
팀장은 한숨 쉬었다. “시장 좁아. 삼성 나와서 삼성 상대로 장사하려고?”
맞는 말이었다.
근데 7년 동안 현장에서 본 게 있었다. 중소 제조업체들은 MES도 제대로 못 쓴다. 엑셀로 생산 관리한다. 2021년에.
시장은 있다고 생각했다.
정부 R&D 과제 2억 받았다. 엔젤 투자 1억. 총 3억으로 시작.
대전 유성구 테크노파크에 사무실 얻었다. 월세 150만원. 평수는 기흥 사무실의 1/10.
직원은 나 포함 3명. 개발자 2명은 대전대 후배. 연봉 4천.
첫날 출근해서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대표다.”
근데 실감이 안 났다.
신분상승의 환상
주변에서는 축하했다.
“대표님 되셨네요!”
“창업가시는구나!”
“멋있다, 형!”
근데 통장에는 월급이 안 들어온다.
삼성 다닐 땐 25일이면 700만원. 칼같이.
지금은 내가 월급 주는 사람. 근데 나는 못 받는다.
첫 6개월은 저축한 돈으로 버텼다. 아내 월급으로 생활비. 내 통장은 회사 운영비.
명함에는 “대표이사”라고 적혀있다.
근데 실제로 하는 일은:
- 개발자 출퇴근 관리
- 정부 과제 보고서 작성
- VC 콜드메일 보내기
- 대기업 구매팀 문의 전화
- 홈페이지 오타 수정
- 사무실 청소
삼성에서는 라인 한 줄 건드리면 수백억 매출에 영향 갔다.
지금은 홈페이지 오타 하나 고치는데 개발자 불러야 한다.
이게 신분상승인가.

삼성 출신이라는 무기
PoC 미팅 갈 때마다 소개한다.
“삼성전자 기흥 7년 근무했습니다.”
분위기가 바뀐다.
“아, 그러시면 현장을 아시겠네요.”
“반도체 공정 경험이 있으시면 우리 라인도 이해 빠르시겠어요.”
“삼성 출신이면 믿을 만하죠.”
대기업 구매팀 담당자들은 삼성 출신을 좋아한다. 검증됐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PoC 3건 중 2건은 “삼성 출신”이라는 말로 문 열었다.
투자자 미팅도 마찬가지.
“팀 백그라운드 보니까 대표님 삼성 출신이시네요?”
“네, 7년 있었습니다.”
“도메인 전문성 있으시겠어요. 좋습니다.”
명함 한 줄이 브랜드가 된다.
삼성전자. 4글자.
근데 이게 무기인지 족쇄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족쇄가 되는 순간
대기업 PoC 진행 중이다.
상대는 구매팀 과장. 나이 비슷해 보인다.
“최 대표님, 그래서 단가가 얼마예요?”
“연 6500만원입니다.”
“아, 그 정도면… 우리가 쓰는 외산 솔루션이 연 8천인데.”
“네, 그래서 20% 저렴합니다.”
“근데 레퍼런스가…”
말을 흐린다.
“저희 현재 5개사 운영 중입니다.”
“중소기업들이죠?”
“네.”
“대기업 레퍼런스는?”
“첫 케이스가 되실 겁니다.”
과장이 웃는다. “첫 케이스요? 저희가요?”
그 웃음에 다 담겨있다.
‘네가 삼성 나왔으면 삼성 레퍼런스 가지고 나오지.’
‘지방 스타트업이 우리한테 팔려고?’
‘PoC는 해주는데, 본계약은 글쎄.’
미팅 끝나고 KTX 타고 대전 돌아온다.
기흥역 지나간다. 예전 출근하던 역.
저 안에 있을 때는 몰랐다. 밖에서 보면 저렇게 높은 벽인지.
연봉 8500에서 0으로
삼성 마지막 해 연봉이 8500만원이었다.
퇴사하던 날 인사팀에서 정산 받았다. 퇴직금 포함 1억 3천.
그게 3년 만에 바닥났다.
창업 1년차: 정부 과제로 버팀. 월급 300만원 꼬박꼬박.
창업 2년차: 매출 발생. 월 400만원. 근데 비용이 월 800만원.
창업 3년차: 매출 600만원. 비용 900만원. 적자 300만원.
지금 내 월급은 0원이다.
직원 6명 월급은 나간다. 4천만원.
사무실 월세. 150만원.
AWS 서버비. 80만원.
마케팅비. 50만원.
기타 경비. 120만원.
총 지출 월 4400만원.
매출 600만원.
적자 3800만원.
정부 과제 남은 돈으로 버틴다. 6개월 치.
6개월 안에 대기업 계약 따내거나, 투자 받거나, 접거나.
아내는 모른다. 내 월급이 0원인 걸.
통장에 5천만원 남았다고 했다. 실제로는 2천만원.
밤에 노트북 켜고 VC 메일 쓴다.
“안녕하세요, 스마트링크 대표 최지방입니다. 삼성전자 기흥 7년 근무…”
삼성 출신이라는 말 꺼내는 내가 초라하다.
판교와 유성구
주 1회 서울 출장.
판교 스타트업캠퍼스 가면 20대 대표들이 보인다.
“저희 시리즈A 30억 받았어요.”
“개발자 15명 채용 중이에요.”
“다음 달 판교 더샵 입주합니다.”
사무실은 넓고 깨끗하다. 간식은 풍족하다. 직원들은 젊고 밝다.
나는 대전 유성구.
테크노파크 건물은 1990년대 지어졌다. 엘리베이터는 느리다.
사무실 창밖은 산. 근처에는 편의점 하나.
직원 평균 나이 35세. 다들 조용하다.
간식은 커피믹스.
판교 스타트업 채용 공고 보면 부럽다.
“시리즈B 투자 유치 완료, 적극 채용 중”
“연봉 상한선 없음, 스톡옵션 제공”
“판교역 5분 거리, 최신 사무환경”
우리 채용 공고는:
“정부 과제 수행 중, 개발자 1명 채용”
“연봉 4천~4500만원”
“대전 유성구 근무, 주차 가능”
지원자 3명. 2명은 면접 불참.
판교는 넘친다. 대전은 모자란다.
근데 나는 대전을 떠날 수 없다.
아내가 공무원이다. 아이가 어린이집 다닌다. 부모님이 근처 산다.
판교 가면 이 모든 게 무너진다.
‘지방 스타트업’ 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산다.
그래도 대표는 대표
동창회 갔다.
고등학교 동창. 20년 만에 보는 얼굴들.
“야, 최지방이다!”
“너 삼성 다닌다며?”
“퇴사했어. 창업했어.”
“헐, 대박. 뭐 해?”
“제조업 쪽 SaaS.”
”…응?”
설명해도 모른다. 그냥 웃는다.
옆에서 친구가 끼어든다. “그러니까 대표라는 거지? 사장?”
“뭐, 그렇지.”
“오, 사장님 됐네!”
분위기가 달라진다.
술 따라준다. 명함 달라고 한다. 사진 찍자고 한다.
근데 속으로는 안다.
이들은 내가 월급 0원인 걸 모른다.
이들은 내가 3800만원 적자인 걸 모른다.
이들은 내가 6개월 안에 투자 못 받으면 접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른다.
그냥 “대표”라는 단어만 듣는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묻는다.
“동창들 어땠어?”
“그냥 그랬어.”
“대표 됐다고 부러워하더라?”
”…응.”
거짓말은 아니다. 부러워하긴 했다.
근데 뭘 부러워하는지 모르고 부러워한다.
신분 같은 건 없다
결론은 없다.
신분상승도 아니고 하락도 아니다.
그냥 다른 삶이다.
삼성 다닐 때:
- 안정적 월급
- 명확한 업무
- 큰 조직의 부품
- 40년 후 퇴직금
스타트업 대표:
- 불안정한 수입
- 모호한 업무
- 작은 조직의 전부
- 6개월 후 미래
어느 게 나은지 모르겠다.
삼성 다닐 때는 이게 싫어서 나왔다.
지금은 가끔 그때가 그립다.
근데 돌아갈 수는 없다.
명함에 “전 삼성전자” 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삼성 사람이 아니다.
PoC 미팅에서 구매팀 과장이 웃을 때, 나는 외부인이다.
판교 스타트업 보면서 부러워할 때, 나는 지방 사람이다.
그래도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한다.
직원들 얼굴 보면 책임감이 생긴다.
대기업 계약서에 사인 받는 날을 상상한다.
시리즈A 투자 받는 날을 꿈꾼다.
그날이 오면 이 글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그때는 힘들었지.’
지금은 그냥 버틴다.
신분상승인지 하락인지 판단은 10년 후에.
KTX 안에서 쓴다. 서울 가는 길. 오늘도 미팅 3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