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현장을 아는 것: 강점이자 고민

제조업 현장을 아는 것: 강점이자 고민

기흥 공장 7년

삼성전자 기흥 라인에서 7년 일했다.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 24시간 돌아가는 현장. 설비 하나 멈추면 시간당 몇천만원 날아간다.

그때는 몰랐다. 그 7년이 나중에 무기가 될 줄.

창업하고 나서 알았다. 현장을 아는 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우리 솔루션 데모할 때마다 느낀다. 고객사 공장장님들 눈빛이 달라진다.

“이거 현장 아시는 분이 만드셨네요.”

그 한마디가 계약으로 이어진다. 기술보다 신뢰다.

경쟁사는 모른다

경쟁 PT 들어가면 안다. 소프트웨어 회사들. 대부분 현장을 몰라.

“저희 AI가 불량률 30% 줄입니다.” “어떤 공정에서요?” ”…모든 공정에서 가능합니다.”

말이 안 된다. 사출이랑 프레스가 같을 리 없다. 현장 사람들은 안다. 저런 말 하는 순간 끝이다.

우리는 다르게 접근한다.

“사출 공정이시죠? 금형 온도 센서 몇 개 달려있나요?” “6개요.” “그럼 우리 솔루션으로 8개로 늘리고, 온도 편차 실시간 모니터링하면 불량률 12% 정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구체적이다. 현실적이다. 고객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쟁사 IR 자료 보면 웃긴다. 공장 사진은 게티이미지에서 다운받은 것. 용어는 인터넷에서 긁어온 것. 현장 사람들은 한 번에 안다.

우리는 기흥에서 찍은 내 사진을 쓴다. 허락받고. 실제 라인 사진. 그게 신뢰다.

현장의 언어

지난주 충주 공장 미팅. 생산관리 부장님.

“CT가 지금 85초인데요.” “목표는요?” “75초로 줄이고 싶은데 병목이 3공정이에요.”

CT. Cycle Time. 생산 사이클 시간. 현장 용어다. 설명 안 해도 안다. 3공정 병목. 바로 이해한다.

경쟁사였으면 물어봤을 것이다. “CT가 뭐죠?”

그 순간 끝이다. 현장 사람들은 설명하기 귀찮아한다. 모르면 그냥 다른 업체 부른다.

우리 개발자들한테도 가르친다. 현장 용어. 공정 흐름. 설비 구조. 코드 짜기 전에 먼저 배운다.

“이거 왜 배워야 하나요? 개발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처음엔 다들 그렇게 묻는다. 한 달 지나면 안다. 고객이 뭘 원하는지 이해하려면 현장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문제도 있다

현장을 너무 안다는 게 독이 될 때가 있다.

투자자 미팅. 판교 VC 파트너님.

“시장 규모가 얼마나 되나요?” “국내 제조업체 중 직원 100명 이상이 약 3500곳이고요.” “그게 TAM인가요?” “실제로는 그 중 자동화 여력 있는 곳이 30% 정도라서…”

파트너님 표정이 굳는다.

“왜 30%만 되는데요? 다 필요한 거 아닌가요?”

설명한다. 현장 이야기를. 영세 공장은 투자 여력이 없다는 것. 수작업이 더 싸다는 것. 사장님이 IT 자체를 안 믿는다는 것.

“그럼 시장이 너무 작은데요.”

현실이 그렇다. 근데 투자자는 큰 숫자를 원한다. 현장을 아니까 솔직하게 말한다. 그게 마이너스가 된다.

서울 스타트업들 IR 보면 다르다. TAM 10조. SAM 3조. 근사하게 뻥튀기한다. 투자 받는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말한다. 투자 안 받는다.

이게 맞는 건가. 가끔 모르겠다.

제품 개발의 딜레마

우리 솔루션은 현실적이다. 과하지 않다. 딱 필요한 기능만 있다.

“AI 예측 정확도가 왜 82%인가요? 95% 이상 만들어야죠.”

현장에서는 82%면 충분하다. 95%는 과적합이다. 실제 라인에서는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안다. 기흥에서 겪었다.

근데 고객은 95%를 원한다. 숫자만 본다.

경쟁사는 95%라고 쓴다. 데모 환경에서만 돌아간다. 실제 현장 가면 70%도 안 나온다. 근데 계약은 따낸다.

우리는 정직하게 82%라고 쓴다. 실제 현장에서 82% 나온다. 근데 계약 못 따낸다.

이게 맞나. 현장을 아는 게 맞나. 모르는 척하고 뻥치는 게 나을까.

밤마다 고민한다.

개발팀장 민수가 말했다.

“대표님, 우리도 그냥 95%라고 쓰면 안 돼요? 어차피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화가 났다. 근데 뭐라 말 못 했다. 민수 말도 틀린 건 아니니까.

채용의 어려움

현장 경험자를 뽑고 싶다. 제조업 경력 있는 개발자. 근데 없다. 대전에는.

서울은 다르다. 제조업 출신 개발자들이 많다. 스타트업도 많다. 선택지가 많다.

대전은 그냥 없다. 있어도 대기업 붙잡고 있다. 연봉 맞춰줄 수도 없다.

그래서 현장 모르는 개발자를 뽑는다. 가르친다. 3개월 걸린다. 그 사이 다른 스타트업으로 간다. 서울로.

“죄송합니다 대표님. 더 좋은 기회가 와서요.”

다시 뽑는다. 다시 가르친다. 반복한다.

현장을 아는 게 강점이라면서. 그걸 전파할 사람이 없다. 아이러니다.

혼자 알고 있으면 뭐하나. 회사가 커지려면 팀이 알아야 하는데.

고객이 아는 것

그래도 고객은 안다. 우리가 진짜라는 걸.

천안 자동차 부품 공장. 두 달 전 PoC 끝났다. 어제 전화 왔다.

“최 대표님, 우리 본계약 하려고요.” “감사합니다. 금액은…” “조달청 가격 그대로 하죠. 대신 다른 라인도 해주세요.”

2500만원. 3개 라인 확장. 연 매출 1억 고객 되는 거다.

“경쟁사 3곳 더 봤는데요. 최 대표님이 제일 현장을 아시더라고요. 믿고 갑니다.”

그 말 듣는 순간. 기흥 7년이 떠올랐다. 야근하던 날들. 설비 앞에서 모니터 보던 시간들.

헛되지 않았다. 지금 쓰인다.

투자자는 모른다. 이 가치를. 현장을 아는 게 얼마나 큰 해자인지.

천천히 간다. 우리 속도로. 고객이 알아주는 속도로.

제조업의 미래

요즘 뉴스 보면 AI다 뭐다 시끄럽다. 제조업은 망한다고 한다. 다 로봇이 대체한다고.

웃긴다. 현장 가보지도 않고 하는 소리다.

제조업은 안 없어진다. 방법이 바뀔 뿐이다. 더 스마트해질 뿐이다.

그 중간에 우리가 있다. 현장과 기술을 연결하는.

현장 없는 기술은 뜬다. 기술 없는 현장은 죽는다. 둘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사람이다. 기흥에서 배웠다. 창업해서 실천한다.

느리다. 맞다. 서울 스타트업들보다 느리다. 덜 화려하다.

근데 우리는 진짜다. 현장이 증명한다. 고객이 증명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은.

KTX 안에서

다음 주 또 서울 간다. VC 2곳 미팅. 정부 과제 발표. 저녁에는 제조 스타트업 모임.

KTX 시간표 확인했다. 6시 반 첫차. 8시 반 도착. 미팅 9시.

노트북 챙긴다. 가는 길에 IR 자료 고친다. 어떻게 설명할까. 현장의 가치를. TAM 숫자 말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공장들이 보인다. 평택. 천안. 저기도 우리 고객될 곳들이다.

숫자로 설명 못 하는 시장. 현장 가봐야 아는 니즈. 그게 우리 강점이다.

투자자가 모르면 어쩔 수 없다. 고객은 안다. 그걸로 버틴다.

기흥 7년. 창업 3년. 앞으로 얼마나 더 갈까.

모른다. 근데 계속 간다. 현장을 아니까. 그게 내 무기니까.



현장 아는 게 답이다. 느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