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KTX 타면서 느낀 것들
- 03 Dec, 2025
새벽 5시 KTX 타면서 느낀 것들
알람은 4시 10분
알람 울린다. 4시 10분. 아내가 뒤척인다. 미안하다.
어제 밤 11시에 잤다. 5시간 못 잤다. 세수하고 어젯밤에 준비한 옷 입는다. 정장 아니다. 깔끔한 셔츠에 면바지. 서울 가면 다들 후드 입고 있다.
아들 방 살짝 열어본다. 자고 있다. 2살이다. 아빠가 새벽에 나가는 줄 모른다. 다행이다. 울면 마음 아프다.
현관에서 신발 신는다. 아내가 부엌에서 나온다. “조심히 다녀와.” “응. 저녁에 올게.”
엘리베이터 안. 나 혼자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피곤하다.

대전역 5시 20분
택시 탄다. 기사님 반갑게 인사한다. “서울 가세요?” “네, 첫 차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 대화 일주일에 두 번 한다. 같은 기사님이다. 단골이다.
대전역 도착. 5시 20분. 역 안 카페는 아직 안 열었다. 편의점 커피 뽑는다. 아메리카노 벤티. 2700원. 이제 3000원 넘나.
대합실에 사람 별로 없다. 출근하는 직장인 몇 명. 나처럼 노트북 가방 멘 사람 둘. 스타트업인지 대기업 출장인지 모르겠다.
개찰구 통과한다. 플랫폼에 서 있다. 5월인데 새벽은 춥다.
KTX 들어온다. 5시 43분 출발. 항상 이 시간이다. 외운다.

기차 안 2시간
자리 찾는다. 2호차 창가. 항상 여기 앉는다. 습관이다.
노트북 꺼낸다. 맥북 프로 14인치. 회사 돈으로 산 거다. 280만원. 살 때 고민 많이 했다.
와이파이 연결한다. KTX-WiFi. 느리다. 가끔 끊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오늘 미팅 자료 열어본다. 9시 30분 판교 VC. 11시 여의도 대기업 구매팀. 1시 30분 강남 고객사.
판교 자료부터 본다. IR 덱이다. 42페이지. 이번 달에 15번째 IR이다.
슬라이드 넘긴다. “Why Daejeon?” 페이지 나온다. 항상 이 질문 나온다.
답은 준비돼 있다. “제조 거점 집중, 인건비 효율, 정부 지원.” 근데 솔직히 나도 가끔 의문이다.
창밖 본다. 아직 어둡다. 천안 지나간다. 불빛 보인다. 사람들 일어나는 시간이다.
커피 마신다. 식었다. 편의점 커피는 금방 식는다. 서울 도착하면 또 사야 한다.
메일 확인한다. 새벽에 온 메일 3개. 전부 스팸이다. 투자 제안 사기. “1억 투자 가능합니다” 제목. 누가 믿나.
슬랙 켠다. 메시지 없다. 직원들 아직 안 일어났다. 8시 반에 출근이다.
근데 나는 이미 1시간 반째다.

서울역 7시 45분
도착한다. 서울역. 사람 많다. 출근 시간이다.
역 안 스타벅스 들어간다. 줄 길다. 10명 넘는다. 다들 테이크아웃이다.
아메리카노 벤티 주문한다. 5900원. 대전보다 비싸다. 아니 대전이랑 똑같나. 잘 모르겠다.
커피 받고 지하철 탄다. 2호선 판교행 환승. 신논현역까지 40분.
지하철 안 사람 많다. 앉을 자리 없다. 노트북 가방 무겁다.
핸드폰 본다. 뉴스레터 읽는다. “판교 스타트업 시리즈 B 300억” 부럽다.
우리는 엔젤 1억 받는 데 6개월 걸렸다. 대전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우리 실력 부족이다.
신논현역 도착. 8시 30분. VC 사무실까지 걸어간다. 15분. 미팅까지 45분 남았다.
카페 들어간다. 또. 아메리카노 또 시킨다. 오늘 벌써 세 번째다.
노트북 켠다. 자료 마지막 점검한다. 숫자 다시 확인한다.
근데 집중 안 된다. 피곤하다.
미팅 9시 30분
VC 사무실 도착한다. 9시 25분. 로비에서 기다린다.
대표님 나온다. 30대 중반쯤. 명함 교환한다. “먼 데서 오셨어요?” “네, 대전에서요.” “아, 그러시구나. 고생 많으셨겠어요.”
이 말 듣는 순간. ‘아, 이미 끝났구나’ 싶다.
미팅룸 들어간다. 노트북 연결한다. 화면 안 나온다. 어댑터 문제다. 당황한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근데 시간은 빠르게 간다.
겨우 연결한다. 발표 시작한다.
“저희는 제조 B2B SaaS입니다.” “대전 본사, 판교 영업 거점 운영 중입니다.” “현재 월 매출 600만원…”
대표님 표정 읽는다. 관심 없어 보인다.
“고객사는 어디어디인가요?” “충청권 중소 제조업체 위주입니다.”
“서울 고객은요?” “PoC 진행 중인 대기업 1곳 있습니다.”
“음…”
이 ‘음’이 전부다.
30분 미팅. 25분 만에 끝난다. “검토 후 연락드릴게요.” 연락 안 온다. 안다.
악수하고 나온다. 엘리베이터 탄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더 피곤해 보인다.
여의도 11시
지하철 탄다. 2호선 또. 여의도까지 30분.
핸드폰 본다. 직원한테 슬랙 왔다. “대표님 미팅 어떠셨어요?” “글쎄. 기대 안 함.” “ㅠㅠ 다음엔 잘 될 거예요.”
고맙다. 근데 다음도 똑같을 거다.
여의도 도착. 대기업 본사 빌딩 들어간다. 로비 화려하다.
보안 카드 받는다. 23층 올라간다.
구매팀장님 만난다. 40대 중반. 친절하다.
“저희 공장 스마트화 검토 중입니다.” “솔루션 데모 가능할까요?”
가능하다. 노트북 꺼낸다.
데모 보여준다. 팀장님 고개 끄덕인다. “괜찮네요.”
“근데 레퍼런스가 좀…” 또 이거다.
“대기업 레퍼런스 있으신가요?” “현재 PoC 진행 중입니다.” “완료된 건요?” “아직은…”
“그럼 좀 더 지켜보고 연락드릴게요.”
나온다. 복도에서 한숨 쉰다.
레퍼런스 없으면 못 받는다. 레퍼런스 받으려면 대기업 필요하다. 대기업은 레퍼런스 요구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강남 1시 30분
점심 먹는다. 강남역 근처. 혼자다.
김치찌개 시킨다. 9000원. 대전이면 7000원이다.
밥 먹으면서 핸드폰 본다. 아내한테 카톡 온다. “점심 먹었어?” “응 지금 먹어.” “고생 많아. 힘내.”
사진 보낸다. 아들 사진. 어린이집에서 찍은 거다. 웃고 있다.
힘난다. 조금.
1시 20분. 고객사 간다. 스타트업이다. 시리즈 A 받았다.
대표님 만난다. 30대 초반. 나보다 어리다.
“현장 데이터 수집 어떻게 하세요?” 설명한다.
“IoT 센서 설치하고…” “데이터 클라우드 전송…” “대시보드에서 실시간 모니터링…”
대표님 관심 있어 보인다. “비용은 어떻게 되나요?”
비용 설명한다. 초기 설치비 500만원. 월 구독료 50만원.
“음… 좀 비싸네요.” 비싸다. 안다.
“근데 ROI 계산하면…” “일단 검토해볼게요.”
또 검토.
나온다. 강남역 지하철역 간다.
서울역까지 30분. KTX 4시 30분. 아직 시간 있다.
카페 들어간다. 아메리카노 또 시킨다. 오늘 다섯 번째다.
노트북 켠다. 오늘 미팅 정리한다.
판교 VC - 관심 없음 여의도 대기업 - 레퍼런스 필요 강남 고객사 - 비용 부담
결과: 0
서울역 4시
KTX 탄다. 4시 30분. 대전행.
자리 앉는다. 같은 자리. 2호차 창가.
노트북 닫는다. 더 볼 힘 없다.
창밖 본다. 서울 빠져나간다.
핸드폰 본다. 뉴스 읽는다.
“지방 스타트업 투자 감소” “수도권 집중 심화” “지역 인재 유출 가속”
기사 닫는다. 기분 나빠진다.
슬랙 확인한다. 직원들 메시지 있다.
“대표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개발 회의 있어요.” “고객 문의 3건 왔어요.”
답장한다. “ㅇㅇ 내일 봐.”
눈 감는다. 잠깐 자려고.
근데 잠 안 온다. 머릿속 복잡하다.
오늘 교통비. KTX 왕복 5만원. 지하철 5000원. 택시 1만원. 커피 3만원. 점심 9000원.
총 9만 4000원.
성과: 0원.
이게 맞나.
대전역 6시 30분
도착한다. 사람들 우르르 내린다.
택시 탄다. 또 단골 기사님이다.
“오늘도 다녀오셨네요.” “네.” “힘드시죠?” “괜찮습니다.”
거짓말이다.
집 도착한다. 6시 50분. 초인종 누른다.
아내가 문 연다. 아들이 뛰어나온다. “아빠!”
안아준다. 무겁다. 많이 컸다.
“오늘 어땠어?” “그냥 그랬어.”
저녁 먹는다. 아내가 해놓은 밥. 된장찌개에 김치.
맛있다. 서울 음식보다 낫다.
밥 먹고 아들이랑 논다. 블록 쌓기. 30분 한다.
8시. 아들 재운다. 동화책 읽어준다. 자장가 부른다.
잠든다.
거실 나온다. 아내가 설거지한다.
“나도 할게.” “아니야. 너 쉬어.”
소파에 앉는다. 노트북 켠다.
메일 확인한다. 새로운 VC 콜드메일 보낸다.
“안녕하세요. 대전 기반 제조 B2B SaaS…”
보내기 누른다.
답장 올까. 모르겠다.
시계 본다. 9시.
내일도 서울 간다. 새벽 5시 KTX.
알람 맞춘다. 4시 10분.
그래도
침대 눕는다. 아내 옆에.
“고생했어.” “응.”
“서울 이사 안 갈 거지?” ”…안 가.”
아내 손 잡는다. 따뜻하다.
창밖 본다. 대전 밤하늘.
서울보다 별 많다. 그건 좋다.
내일도 5시에 일어난다. 또 KTX 탄다. 또 미팅한다. 또 거절당한다.
근데 뭐.
여기가 내 자리다. 대전이.
눈 감는다.
새벽 5시 KTX는 내 사무실이다. 거기서 일하고 거기서 고민한다. 오늘도 표 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