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퇴근했다고

저녁 9시에 퇴근했다고 쓰지만, 집에서도 노트북은 켜져 있다

저녁 9시에 퇴근했다고 쓰지만, 집에서도 노트북은 켜져 있다

퇴근은 9시, 퇴근이 아닌 9시 사무실을 나선다 저녁 9시. 사무실 불을 끈다. "대표님 먼저 가세요." 개발팀장이 말한다. "응, 수고했어. 내일 봐."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겨울이라 벌써 깜깜하다. 차에 시동을 건다. 히터를 튼다. 오늘도 12시간 일했다. 집에 가면 아들은 자고 있겠지. 근데 아직 안 끝났다. 집까지 20분. 그 사이 슬랙 알림 3개. 신호 대기 중에 본다. 고객사 문의다. "내일 답장하면 안 되나?" 혼잣말. 근데 손은 이미 타이핑하고 있다.집에 도착한다 9시 30분. 현관문을 연다. 아내가 설거지 중이다. "왔어?" "응. 밥 먹었어?" "먹었지. 당신 거 냉장고." 아들 방에 들어간다. 자고 있다. 이불을 덮어준다. 볼에 뽀뽀한다. 하루에 보는 시간 30분. 아침에 어린이집 데려다주는 게 전부다. 거실로 나온다. 소파에 앉는다. 노트북을 꺼낸다. 습관이다. "또 일해?" 아내가 묻는다. "아니, 그냥 메일 확인만." 근데 '그냥 확인'이 없다. 메일함에 읽지 않은 메일 47개. VC 답장, 고객 문의, 팀원 보고서, 정부 과제 공고. 하나씩 읽는다. 답장한다. 30분 지나간다.토요일도 마찬가지 주말이다. 오전 10시. 아들과 놀이터에 간다. 그네를 밀어준다. "아빠, 더!" 아들이 웃는다. "그래, 더 높이!" 근데 주머니에서 진동. 슬랙이다. 판교 영업 직원. "대표님, 고객사에서 갑자기 미팅 요청이요. 월요일 10시 가능하세요?" 그네를 밀면서 답장한다. "가능. 자료는 내가 오늘 밤에 보낼게." "죄송해요 주말인데." "괜찮아. 좋은 신호잖아." 아들은 계속 웃고 있다. 나는 그네를 밀면서 머릿속으로 PT 구성한다.기존 문제점 / 2. 우리 솔루션 / 3. ROI 계산 익숙하다. 자동이다.일요일 밤이 제일 싫다 일요일 저녁 8시. 아들을 재운다. 동화책 세 권 읽어준다. "아빠 내일도 집에 있어?" "아니, 아빠 일하러 가야지." "왜?" "...돈 벌어야지." 아들이 잠든다. 거실로 나온다. 노트북을 연다. 월요일 미팅 자료를 만든다. 새벽 1시. 자료 완성. 슬랙에 올린다. "@김대리 월요일 이거로 갑시다." 3분 뒤 답장. "확인했습니다." 김대리도 안 자고 있었다. 침대에 눕는다. 아내는 자고 있다. 불을 끈다. 근데 눈이 안 감긴다. 스마트폰을 켠다. 슬랙을 본다. 메일을 본다. 네이버 뉴스를 본다. 스타트업 관련 기사. "XX사, 시리즈B 300억 유치" 부럽다. 우리는 언제쯤? 잠이 안 온다. 퇴근이라는 말 "몇 시에 퇴근하세요?" 투자자가 물어본 적 있다. IR 미팅에서. "보통 9시요." "일찍 하시네요." 일찍이라고? 9시에 사무실 나오는 게 일찍? 근데 맞는 말이다. 내가 아는 서울 스타트업 대표들. 밤 11시까지는 기본이다. 대전에서 9시 퇴근은 양반이다. 하지만 '퇴근'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 사무실을 나오는 게 퇴근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일이 안 떠나는 게 문제다. 샤워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아들이랑 놀 때도. "고객사 미팅 어떻게 풀지?" "개발자 채용 공고 어떻게 쓸까?" "다음 분기 매출 어떻게 채우지?" 끊을 수가 없다. 스위치가 고장 났다. 가끔 생각한다 "이게 맞나?" 3년 전 창업했을 때. '워라밸 좋은 대표가 되자' 생각했다. 삼성전자 다닐 때 야근에 지쳐서 나왔는데. 결과는? 더 심하다. 회사원 때는 야근해도 월급 나왔다. 지금은? 내 돈 까먹으면서 야근한다. 밤새워도 매출은 제자리다. 근데 그만둘 수 없다. 직원 6명 월급. 정부 과제 책임. 고객사 약속.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 서울 스타트업들 보면 자극된다. "나도 할 수 있다" 증명하고 싶다. 지방이라서 안 되는 거 아니라는 거. 아내가 말했다 지난주 토요일. "당신,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 아내가 말했다. "괜찮아. 다음 달에 대기업 계약 들어오면 나아질 거야." "지난달에도 그 말 했잖아." 할 말이 없었다. "아들이 어제 물어봤어. '아빠는 왜 맨날 컴퓨터 봐?' 라고." 가슴이 찔렸다. "미안." "미안하지 말고, 좀 쉬어. 제발." 근데 어떻게 쉬나. 쉬면 불안하다. 경쟁사는 쉬지 않는다. 서울 스타트업들은 주말에도 달린다. "투자 받으면 나아질 거야." "그것도 지난해에 한 말이야." 맞는 말이다. 작년 엔젤 투자 받았을 때. "이제 좀 여유 생긴다" 했다. 근데 더 바빠졌다. 투자금 태우면 안 된다는 압박. 성과 내야 한다는 부담. 시리즈A 준비해야 한다는 조급함. 돈이 들어와도 마음은 안 편하다. 언제쯤 될까 "언제쯤 여유 생겨요?" 후배가 물어본 적 있다. 창업 상담. "글쎄. 엑시트하면?"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담이다. 매출 10억 넘으면? 아니다. 그때는 직원 20명 될 거다. 시리즈B 받으면? 아니다. 그때는 목표가 100억이 된다. 끝이 없다. 스타트업 대표는 원래 이런 거다. 선배들 보면 다 그렇다. 회사 규모 커져도 불안은 그대로다. '퇴근'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그래도 한다. 왜? 내가 선택했으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삼성 관두고 나올 때. 안정 버리고 창업할 때. 다 알고 했다. 근데 가끔. 정말 가끔. "그냥 다시 취업할까?" 생각한다. 저녁 6시 퇴근. 주말은 진짜 쉬기. 월급 통장에 꼬박꼬박. 근데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팀원들 보면. "아, 나는 여기가 맞다" 생각한다. 오늘도 9시에 퇴근한다 저녁 9시. 사무실 불을 끈다. "수고했어요." 팀원들에게 인사한다. "대표님도요." 차에 탄다. 집으로 간다. 20분 뒤 도착. 노트북을 켠다. 슬랙을 확인한다. 메일을 읽는다. 내일 일정을 정리한다. 오전 10시 판교 미팅. 새벽 5시 50분 KTX. 자료는 준비됐다. 침대에 눕는다. 스마트폰을 본다. 슬랙 알림 2개. "또 일해?" 아내 목소리. "아니, 이제 잔다." 근데 5분 뒤. 또 스마트폰을 켠다. 이게 창업이다. 이게 대표다. 퇴근은 9시. 근데 퇴근이 아니다.퇴근 시간은 있다. 퇴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