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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 02 Dec, 2025
KTX 정기권이 나의 사무실이 된 지 1년
KTX 정기권이 나의 사무실이 된 지 1년 알람이 울린다. 월요일 아침 6시 47분. KTX 첫 차 타려면 6시 50분까지 역에 도착해야 한다. 25분밖에 없다. 집에서 대전역까지 15분. 계산이 안 맞는다. 어제부터 이미 짐을 다 챙겨뒀다. 양치질하고 옷만 입으면 된다. 아내는 아직 자고 있다. 2살 아들도. "가고 와." 문자로만 남기고 나간다. 문구점 가 듯이. 차에 올라탄다. KTX 타기 전에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와 계란말이를 산다. 이게 아침 식사다. 밥을 먹을 시간이 없다. 역에서 뛰어간다. 어제도, 그저께도, 지난 일 년도 이렇게 뛰었다.6시 58분, 승차 승차 벨이 울린다. "다음 정거장은 서울." 정기권을 찍고 들어간다. 같은 차량, 같은 자리. 2-C. 창가 자리. 창문 옆에 콘센트가 있다. 이게 내 자리다. 1년 동안 여기서만 일한다. 노트북을 켠다. 시동이 걸릴 때까지 커피를 마신다. 화면이 켜진다. 시간이 벌써 7시 3분. 서울 도착은 9시 정도. 105분의 업무 시간이 생겼다. 슬랙 확인. 메시지 7개. 대전 본사 팀원들 밤 10시에 보낸 것들. "CEO님, 삼성 담당자가 자료 요청했어요" "내일 VC 콜 시간 확인 가능할까요?" "개발 진행 상황 보고 있습니다"105분. 이 시간 안에 회신하고, 피칭 자료 업데이트하고, 발표 연습도 해야 한다. 할 것들을 메모한다.삼성 자료 수정 (15분) 원스톱 펀딩 VC 피치덱 V7 → V8 (40분) 대전 팀 슬랙 회신 (10분) 오후 미팅 체크리스트 정리 (20분)계산이 안 맞는다. 105분에 85분을 넣으려고 한다. 근데 매주 이렇게 한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춘다. 익숙하다. KTX 흔들림 속에서 일하기도 이제 습관이다. 맞춤법 틀려도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 일단 빨리. 빨리 해야 한다. 옆 좌석엔 할머니가 앉아 있다. 종로 갈라고. 처음 3개월은 신경 썼다. 내가 노트북하고 있으니까 자기도 괜찮나 싶고.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본다. 할머니도 내 노트북을 안 본다. 이게 예의다. 대전을 떠나고 2시간 50분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할 일의 60%는 끝난다. "이거 왜 기차에서 보내요?" 판교 VC 담당자가 물었다. 메일 타임스탬프를 봤나 본다. 아침 7시 45분. KTX 안에서 보낸 거다. "이동 중입니다." 이렇게만 썼다. 더 이상 설명하기 싫다. 설명해도 이해 못 할 것 같다. 그 담당자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고, 판교에서 일한다. 대전이 어디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대전공. 농구팀 아니냐고. 농구팀도 있긴 하다. KTX에서 일하는 게 낭만적으로 들릴 줄 알았다. "오, 기차에서도 일하시네요. 멋있네요." 이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 현실은 다르다. "기차에서 일하신다니까 좀 불안정하지 않나요?" 그 말이 더 자주 나온다. 회사가 불안정해 보인다는 뜻이다. 그게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마이너스다. 이미.대전 같은 곳에선 이게 정상이다 처음 사람들한테 설명했을 때 반응이 이랬다. "KTX요? 왜?" "대전에서 일할 수 없으니까요." "아, 서울이 손해가 되지 않나요?" KTX 정기권이 월 26만 원이다. 아메리카노와 계란말이가 6천 원. 일 년에 312만 원의 정기권. 52주 × 2회. 104일을 KTX에서 산다. 하루 3시간. 총 312시간. 연간 312시간을 기차 안에서 일한다. 임차료로 계산하면 시간당 1만 원이다. 그런데 정기권을 안 끊으면 어쩌나. VC들은 서울에만 있다. 우리 고객도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다. 제조업 기업들이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다. 팩토리는 지방에 있어도. 대전에서 일하려고 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개발자 없나요?" 대전에는 없다. 진짜로. 우리가 필요한 임베디드 리눅스 엔지니어 구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서울 연봉 6500만 원, 대전으로 와서 5000만 원 받겠어? 아무도 안 온다. "사무실 없나요?" 판교 스타트업 오피스. 월 200만 원 정도. 대전 일반 사무실. 월 100만 원. 근데 스타트업들은 판교로 간다. 생태계가 있으니까. 대전엔 뭐가 있나. 정부 과제 설명회. 이게 다다. 그래서 나는 KTX를 탄다. "이 정도면 충청권에서 제일 열심히 하는 거 같은데요." 지난달 충청권 창업 연합회에서 누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가장 슬펐다. 열심히 한다는 건 정상이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105분의 루틴 월요일. 오전 회차. 7시 정기권 체크. 07:03 노트북 ON. 07:15 삼성 자료 수정 완료. 07:55 VC 피치덱 수정 버전 저장. 08:22 팀 회신 완료. 08:45 오후 미팅 프레임 정리. 매주 반복이다. 수요일. 오후 회차. 16시 대전역 탑승. 16:05 메일 체크. 16:20 고객 보고서 작성 시작. 17:10 슬라이드 정렬. 17:45 코드 리뷰 (개발팀이 보낸 영상). 18:10 내일 미팅 주요 포인트 정리. 105분씩 두 번. 주 210분. 한 달 840분. 일 년 10080분. 그 시간에 뭘 했나.피치덱: V1 → V9 (8번 수정) VC 미팅: 17곳 (3곳 2차, 1곳 3차) 고객 제안서: 12개 회사 팀 온보딩: 개발자 3명 (근데 2명 떠남. 원격 근무는 아니었고, 연봉이었다) 정부 과제 지원서: 4개 (2개 통과)생산성이 높나. 그냥 바쁜 거 아닌가. 구분 못 한다.아내의 침묵 "또 간다고?" 아내가 몇 달 전에 물었다. 월요일 아침. "응. 미팅이 3개 있어." "한두 번도 아니고, 매주?" "응." "아이 많이 봐." 이 말이 전부다. 아내는 대전에서 공무원이다. 월급이 나온다. 계획이 있다. 휴가도 정해져 있다. 그런데 나는 매주 두 번 사라진다. "엄마는 어디 가?" 2살 아들이 물었다. 엄마 말고 아빠 말이다. 엄마가 말해줘. "아빠는 서울." "아빠 일?" "응. 아빠 일이 서울에 있어." 이제 아들은 물어보지 않는다. 나가는 게 정상이 됐다. 아빠는 월요일과 수요일에 없는 엄마, 할머니 품에 있는 아이다. 이게 정상인가. 모르겠다. 아내는 주말에 "충전"이라는 말을 쓴다. "주말에 충전할 시간이 있어?" "일이 있으니까." "일이 항상 있지. 아들 봐." 주말에도 노트북을 켜고 앉는다. 정부 과제 보고서. IR 자료. 다음 주 미팅 준비. 아들이 노트북 화면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자유로운 선. 마우스 커서 같은 선. "아, 저장 안 했는데." 다시 켜기 귀찮다. 그냥 남겨둔다. 1년이 끝나고 정기권을 또 샀다. 계약 기간이 끝나서 새로 사는 거다. 26만 원. 카드를 긋는다. 익숙하다. 마치 월급 내는 것처럼. 얼마 전 투자 미팅이 있었다. 판교의 한 VC. "왜 대전에 있어요?" 또 이 질문이다. "제조업 고객이 충청권이 중심이고. 개발팀도 여기 있습니다." "근데 불편하지 않나요?" "KTX 정기권 있잖아요." "아." 그 이후로 투자 회신이 없다. 메일로 답장이 왔다. "현재로선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맞지 않는다. 우리가 아니라 상황이. 아니, 우리가. 둘 다 맞지 않는다. 그래도 내일도 KTX를 탄다. 월요일 아침 6시 50분. 또 뛸 것 같다. "가고 와." 아내에게 문자를 쓴다. 아들은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KTX 정기권을 떼기 전에, 뭔가 바뀔 거 같기도 하고. 그냥 이대로 탈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