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 과제 2억: 축복인가 함정인가

정부 R&D 과제 2억: 축복인가 함정인가

정부 R&D 과제 2억: 축복인가 함정인가

통장에 2억이 들어온 날

작년 8월이었다. 정부 과제 선정 통보 받고 통장 확인했다. 2억.

직원들한테 회식 쏜다고 했다. 다들 좋아했다. 나도 좋았다. 그날은.

근데 그날 밤에 잠이 안 왔다. 2억 쓸 계획 세우는데 머리가 아팠다. 인건비, 재료비, 외주비. 다 정해진 항목이다. 마음대로 못 쓴다.

그리고 1년 후엔 결과 보고서 써야 한다. 실패하면 돈 토해내야 한다.

축복인가 싶었다.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월 매출 600만원의 의미

우리 회사 자체 매출은 한 달에 600만원이다. 많을 때 700만원.

직원 6명 월급이 2500만원이다. 사무실 월세 150만원. 서버비 80만원. 기타 비용 200만원.

계산하면 한 달에 2930만원 나간다. 매출로는 600만원 들어온다.

차액이 2330만원이다. 이걸 정부 과제로 메운다.

정부 과제 없으면 우리 회사는 3주 만에 망한다. 이게 현실이다.

과제 쓰는 시간

정부 과제 공고 뜨면 무조건 지원한다. 안 맞아도 일단 쓴다.

작년에 과제 제안서 7개 썼다. 붙은 건 2개다. 확률 28%.

제안서 하나 쓰는데 2주 걸린다. 밤새는 날이 4~5일이다.

계산하면 작년에 과제 쓰느라 14주를 썼다. 3개월 반이다.

그 시간에 영업했으면 어땠을까. 제품 개발했으면 어땠을까.

근데 영업해도 계약 따기 어렵다. 제품 개발해도 당장 돈 안 된다.

결국 과제를 쓴다. 또 쓴다.

대기업 PoC의 함정

지금 S전자랑 PoC 하고 있다. 실증 사업이다. 6개월짜리.

성공하면 본 계약 가능성 있다고 했다. 금액은 안 말해줬다.

근데 이 PoC도 정부 돈이다. 실증 지원 사업으로 따낸 거다.

S전자 담당자가 말했다. “정부 지원 끝나면 자체 예산 검토해보겠습니다.”

검토해본다는 게 뭔지 안다. 안 한다는 뜻이다.

대기업들은 정부 돈 있을 때만 스타트업이랑 한다. 공짜니까.

우리도 안다. 근데 할 수밖에 없다. 이게 실적이 되니까.

투자 받을 때 “S전자랑 협업 중”이라고 쓴다. 먹힌다.

VC 미팅에서 받는 질문

서울 VC 만나러 가면 꼭 받는 질문이 있다.

“자체 매출 비중이 얼마나 되세요?”

정직하게 답한다. “20%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정부 과제요.”

표정이 변한다. 미묘하게.

“정부 의존도를 줄일 계획은요?”

계획 말한다. 대기업 계약, 해외 진출, 구독 모델 전환.

다 맞는 말이다. 근데 당장은 안 된다.

“내년에는 자체 매출 50% 목표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목표는 목표니까.

근데 가능할까. 솔직히 모르겠다.

과제 끝나는 날의 공포

올해 12월에 큰 과제 하나 끝난다. 1년 8개월짜리.

그 과제 인건비로 개발자 2명 월급 줬다. 재료비로 장비 샀다.

12월 되면 그 돈 끊긴다. 개발자 2명 월급을 어떻게 주지.

신규 과제 따야 한다. 9월에 공고 뜬다. 지금 준비 중이다.

근데 떨어지면? 생각하기 싫다.

예비비가 2000만원 있다. 한 달치다.

그다음은? 모르겠다.

밤마다 이 생각 한다. 잠이 안 온다.

지방 창업의 딜레마

대전에서 정부 과제 안 받고 버티는 제조 스타트업 못 봤다.

다들 과제로 산다. 인정한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서울은 다르다는데. 투자 잘 받고 자체 매출로 큰다는데.

진짜 그런가. 서울 가면 달라질까.

근데 서울 가면 비용이 2배다. 사무실도, 인건비도.

그럼 더 큰 투자 받아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대전에 있으면 정부 지원은 받기 쉽다. 지역 할당이 있으니까.

이게 장점이다. 동시에 함정이다.

제조업의 특수성

우리는 제조업 쪽 솔루션이다. 공장 자동화.

이쪽은 개발 기간이 길다. 검증 기간도 길다.

고객이 돈 쓰는 결정도 느리다. 1년씩 걸린다.

그 1년을 버티려면 돈이 필요하다. 정부 과제가 필요하다.

SW 스타트업은 빠르다. 3개월 만에 제품 내고 매출 낸다.

우리는 안 된다. 하드웨어 연동해야 한다. 현장 테스트해야 한다.

이 차이를 VC들은 잘 모른다. 이해 안 해준다.

“왜 이렇게 느려요?” 묻는다.

제조업이 원래 그렇다. 설명해도 통하지 않는다.

직원들한테 미안한 이유

직원들은 모른다. 회사가 얼마나 불안한지.

월급은 밀린 적 없다. 매달 25일에 정확히 준다.

근데 속은 타들어간다. 다음 달 월급 어떻게 주지.

신입 개발자가 물었다. “대표님, 우리 회사 안정적이죠?”

“응, 걱정 마.”

거짓말했다. 안정적이지 않다. 매달 아슬아슬하다.

근데 진실 말하면? 다들 불안해한다. 이직 준비한다.

그래서 말 못 한다. 혼자 버틴다.

대표 혼자 떠안는 게 이런 거구나. 요즘 안다.

탈출구는 있는가

정부 과제 의존에서 벗어나려면 뭐가 필요한가.

첫째, 큰 계약. 연 5억 이상. 가능한가. 어렵다.

둘째, 시리즈A 투자. 10억 이상. 가능한가. 더 어렵다.

셋째, 구독 모델 전환. MRR 3000만원. 가능한가. 시간 걸린다.

다 가능하긴 한데 당장은 아니다. 2년? 3년?

그 사이를 버티려면 결국 정부 과제다.

악순환이다. 알면서도 못 빠져나간다.

그래도 쓴다

이번 달에도 과제 제안서 쓴다. 중기부 공고 떴다.

밤 11시다. 사무실에 나 혼자 남았다.

노트북 켜고 HWP 연다. 사업 계획 작성한다.

“본 사업을 통해 매출 200% 증대 및…” 타이핑한다.

작년에도 썼던 문장이다. 재작년에도 썼다.

매번 쓴다. 매번 믿지 않는다. 그래도 쓴다.

이게 현실이다. 지방 제조 스타트업의 현실.


정부 과제 없으면 한 달도 못 버틴다. 알면서도 계속 쓴다. 이게 함정인지 생존법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