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도 괜찮아요: 자주 외치는 말

대전도 괜찮아요: 자주 외치는 말

오늘도 그 말을 했다

판교에서 미팅 끝나고 나왔다. VC 파트너가 물었다. “왜 서울로 안 오세요?” 나는 자동으로 답했다. “대전도 괜찮아요. 제조업은 현장이 중요하거든요.”

KTX 타고 돌아오는데 생각났다. 이게 몇 번째 하는 말인가.

작년 IR 피칭 6번. 엔젤 투자자 미팅 12번. 정부 과제 발표 4번. 매번 같은 질문, 매번 같은 대답.

“대전에서도 충분히 사업할 수 있습니다.”

입에서 자동으로 나온다. 준비한 것도 아닌데.

준비된 논리

이젠 논리가 체계화됐다. 머릿속에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처럼 정리돼 있다.

“첫째, 제조업 도메인입니다. 고객사 공장이 충청권에 많아요. 현장 대응이 빠릅니다.”

“둘째, 인건비 효율입니다. 서울 시니어 개발자 연봉으로 대전에선 두 명 뽑습니다.”

“셋째, 정부 지원 사업입니다. 대전은 R&D 예산 따기 유리해요.”

“넷째, 삶의 질입니다. 출퇴근 30분, 주거비 절반, 아이 키우기 좋죠.”

IR 덱에도 넣어놨다. ‘왜 대전인가’ 슬라이드. 투자자들 질문 나오기 전에 먼저 설명한다.

근데 이상하다. 설명하면 할수록 변명처럼 들린다.

실제로 괜찮은가

솔직히 따져보자.

제조업 현장 대응? 우리 고객사 절반은 경기도다. 대전에서 2시간 걸린다. 판교 사무실 있으면 30분이다.

인건비 효율? 시니어 개발자를 못 구한다. 대전 개발자 커뮤니티가 작다. 결국 서울 연봉 맞춰줘야 오는데, 그럼 의미 없다.

정부 과제? 맞다. R&D 예산은 잘 딴다. 근데 그게 전부다. VC 투자는 서울 가야 받는다. 대전에서 만난 투자자 0명.

삶의 질? 이건 맞다. 출퇴근 편하다. 아내 직장 안정적이다. 부모님 가깝다. 근데 사업과 무슨 상관인가.

결론: 반만 진실이다.

진짜 이유

왜 대전에 있나. 진짜 이유.

아내가 공무원이다. 대전시청 7년차. 연봉 4500만원. 우리 회사보다 안정적이다. 서울 가면 그만둬야 한다.

부모님이 대전이다. 아들 어린이집 데려다주신다. 주말에 봐주신다. 서울 가면 육아 다 우리가 한다.

나도 솔직히 편하다. 출근 20분. 점심 단골집 있다. 헬스장 5분 거리. 서울 가면 출퇴근 2시간이다.

그리고 무섭다. 서울 가면 경쟁이 보인다. 판교 스타트업들 채용 공고 본다. 우리보다 두 배 빠르다. 투자 규모가 다르다.

대전에 있으면 비교 대상이 적다. ‘충청권 스타트업 중에선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진짜 이유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미팅에서 “왜 서울 안 가세요?” 질문 나온다. 0.5초 안에 느낀다. ‘아, 이 사람 우리 별로 관심 없구나.’

서울 VC들은 안다. 지방 스타트업의 한계를. 개발자 채용 어렵다. 네트워크 약하다. 스케일 안 된다.

“대전도 괜찮아요” 말하는 순간, 나는 변명하고 있다.

IR 끝나고 나온다. 파트너가 명함 주면서 말한다. “서울 오시면 연락 주세요.” 투자 안 한다는 뜻이다.

KTX 타고 돌아온다. 노트북 켠다. 메일 쓴다. “오늘 미팅 감사했습니다. 대전에서도 충분히 성장 가능한 모델입니다.”

보내놓고 생각한다. 누구를 설득하려는 건가. 상대방인가, 나 자신인가.

창업 커뮤니티에서

대전 스타트업 모임 간다. 월 1회. 참석자 15명 정도.

다들 비슷하다. 제조업, 바이오, 정부 과제. 매출 10억 이하. 직원 10명 이하.

술 한잔 하면 나온다. “서울 갈까 말까” 고민. 다들 한 번씩 했다.

누군가 말한다. “대전도 괜찮지 않아요? 여기도 인재 있고.” 다들 고개 끄덕인다. 근데 눈빛은 다르다.

작년에 서울 간 팀 있다. 6개월 만에 시리즈A 50억 받았다. 우리 모임에서 제일 잘나갔던 팀.

이제 그 팀 얘기 안 한다. 비교되니까.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다들 말한다. 근데 카톡방은 조용하다.

숫자로 보면

냉정하게 보자.

대전 스타트업 VC 투자 유치: 작년 3건. 서울: 547건.

대전 스타트업 시리즈A 이상: 12개사. 서울: 600개사 이상.

대전 테크 스타트업 개발자 채용 공고: 평균 지원자 2.3명. 서울: 평균 15.7명.

대전 스타트업 네트워킹 행사: 월 23회. 판교: 주 56회.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대전도 괜찮다”는 말, 숫자로는 안 괜찮다.

작년 이맘때

작년 11월. 서울 VC 파트너가 말했다. “본사 서울로 옮기면 투자 검토하겠습니다.”

밤새 고민했다. 아내랑 이야기했다. “서울 가볼까?”

아내가 물었다. “당신 정말 가고 싶어?” 나는 대답 못 했다.

회사 가고 싶다. 사업 키우고 싶다. 근데 서울 가고 싶지 않다.

모순이다.

결국 안 갔다. VC한테 메일 보냈다. “저희는 대전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제조업 특성상 현장 밀착이 중요해서요.”

답장 안 왔다.

3개월 뒤 다른 VC 미팅 갔다. 또 같은 질문. “왜 서울 안 가세요?”

또 같은 대답. “대전도 괜찮아요.”

진심과 자기최면

이 말이 진심인가.

50%는 진심이다. 대전도 장점 있다. 생활비 싸다. 출퇴근 편하다. 정부 지원 받기 좋다.

50%는 자기최면이다. ‘여기서도 된다’ 믿어야 버틴다. 안 믿으면 불안하다.

IR 때마다 외친다. “대전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외치다 보면 믿게 된다. 믿어야 한다.

안 믿으면 뭐가 되나. 서울 가야 한다. 근데 못 간다. 그럼 포기해야 한다.

포기 안 하려면 믿어야 한다. 그래서 외친다.

“대전도 괜찮아요.”

대표는 영업이다

창업하고 배웠다. 대표는 영업맨이다.

투자자한테 회사 판다. 직원한테 비전 판다. 고객한테 솔루션 판다.

나 자신한테도 판다. “여기서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연습한다. 거울 보고 말한다. “대전도 괜찮아요.” 표정 연습한다. 자신감 있게.

미팅 전날 밤. 예상 질문 적는다. “왜 서울 안 가세요?” 답변 쓴다. 외운다.

KTX에서 리허설한다. 속으로 말한다. “대전에서도 충분히 사업할 수 있습니다.”

미팅장 들어간다. 웃는다. 말한다.

집에 온다. 거울 본다. 피곤하다.

어제 판교에서

어제 미팅. 스타트업 대표 만났다. 나랑 비슷한 업종. 작년에 시리즈A 받았다.

점심 먹으면서 물었다. “힘든 거 없으세요?”

그가 말했다. “개발자 채용이요. 지원자는 많은데 다 주니어예요. 시니어는 네이버 카카오 가죠.”

나는 말했다. “저희는 지원자가 없어요.”

그가 웃었다. “대전이시잖아요.”

나도 웃었다. “네, 대전도 괜찮긴 한데요.”

그는 안 물었다. ‘뭐가 괜찮은데요?’ 안 물어서 다행이다.

대답 준비 안 했다.

아내가 아는 것

아내는 안다. 내가 불안한 거.

주말에 노트북 켜놓으면 안다. 또 서울 스타트업 채용 공고 보는 거.

VC 메일 쓰고 있으면 안다. 또 ‘대전도 괜찮다’ 문장 넣는 거.

말은 안 한다. 그냥 커피 타준다.

한 번 물었다. “서울 가고 싶어?”

나는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아내가 말했다. “거짓말.”

나는 웃었다. “반만 거짓말.”

아내도 웃었다. “어느 반?”

대답 못 했다. 나도 모르겠다.

다음 주 IR

다음 주 또 서울 간다. 액셀러레이터 IR. 20개 팀 피칭.

자료 준비했다. ‘왜 대전인가’ 슬라이드 넣었다. 4가지 이유 적었다.

리허설했다. 타이머 켰다. 3분 30초. 딱 맞다.

거울 보고 연습했다. “대전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목소리 자신감 있게.

준비 끝났다.

근데 자꾸 생각난다. 저번 IR 때 투자자 표정. 내가 “대전도” 말하는 순간 미묘하게 바뀌는 눈빛.

‘아, 이 팀은 아니구나’ 하는 표정.

다음 주도 볼 것 같다. 그 표정.

그래도 말할 것이다. “대전도 괜찮아요.”

안 말하면 뭐라고 하나. 솔직히 말할까. “서울 가고 싶은데 못 가요. 집안 사정이요.”

그럼 더 안 될 것 같다.

커피 내리면서

사무실 커피 내린다. 직원들 출근 전. 조용하다.

창밖 본다. 대덕연구단지 보인다. KAIST 보인다. 멀리 계룡산 보인다.

여기도 나쁘지 않다. 진짜로.

공기 좋다. 출퇴근 편하다. 단골집 있다. 익숙하다.

근데 자꾸 생각난다. 판교 카페에서 본 풍경. 스타트업 대표들 모여 있던 거. 다들 자연스럽게 네트워킹하던 거.

대전엔 그런 카페 없다.

커피 마신다. 쓰다.

노트북 연다. 메일함 본다. “왜 서울 안 오세요?” 질문 들어간 메일 3개.

답장 쓴다. 복붙한다. “대전도 괜찮습니다” 문장.

보낸다.

창밖 다시 본다.


매번 외치는 말. “대전도 괜찮아요.” 반은 진심, 반은 자기최면. 근데 외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오늘도 연습한다. 다음 주 IR 자료에 또 넣는다. ‘왜 대전인가’ 슬라이드. 언젠가 진짜 믿게 될까. 아니면 계속 외치기만 할까. 모르겠다. 일단 오늘도 출근한다. 여기서.